정책은 누가 만드는가 — 정부인가, 현장인가.
들어가며
10강의 몬드라곤은 하나의 부문이 스스로 체계를 만든 사례였다. 이 장의 두 사례는 다른 것을 보여 준다. 조직과 정부의 관계가 어떻게 설계될 수 있는가다.
에밀리아로마냐는 협동조합의 밀도가 높은 지역에서 부문이 스스로 재생산 재원을 만드는 구조를 보여 주고, 볼로냐는 커먼즈 이론이 도시 행정의 절차가 된 사례를 보여 준다. 퀘벡은 그 두 가지와 다른 층위의 문제 — 정책의 정의를 누가 쓰는가 — 를 다룬다.
마지막으로 아른스타인의 참여 사다리를 도입한다. 「참여」와 「협치」라는 말이 남용되는 상황에서 무엇이 실질적 권력이고 무엇이 형식인지를 갈라 보는 도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13주차 자국 진단에서 이 도구를 직접 쓰게 된다.
11.1 에밀리아로마냐 — 부문의 자기 재생산
[도식 11-1] 세 요소의 배치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는 협동조합이 지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조합의 수나 매출이 아니라 그 조합들을 떠받치는 두 개의 장치다.
첫째는 연합회다. Legacoop과 Confcooperative 두 계열의 연합회가 교육·감사·금융 지원을 담당한다. 4강에서 본 독일 의무감사제와 같은 자리에 있는 기능이다. 둘째는 협동조합 발전기금이다. 협동조합이 잉여의 일정 비율을 의무적으로 출연하고, 그 재원이 신규 조합 설립과 부문 육성에 쓰인다.
[표 11-1] 세 장치와 이전 조건
장치 | 내용 | 무엇을 대신하는가 | 이전 시 필요한 것 |
연합회 | 교육 · 감사 · 컨설팅 · 금융 알선 | 4강에서 본 외부 규율 장치의 공백 | 다수 조합의 존재 · 회비 부담 능력 |
발전기금 의무 출연 | 잉여의 일정 비율을 부문 기금에 출연 | 정부 지원 예산 | 법적 근거 · 조합의 수용 |
컨소시엄 | 여러 조합이 공동으로 입찰 · 계약 수행 | 합병을 통한 규모화 | 공공조달 제도의 수용 · 조합 간 신뢰 |
표의 세 번째 열이 이 절의 논점이다. 세 장치는 모두 「정부가 해 줄 일」을 부문이 스스로 하는 구조다. 12강에서 볼 한국의 구조 — 지원 예산과 중간지원조직이 정부에서 나오는 구조 — 와 정확히 대비된다.
11.2 컨소시엄 — 합치지 않고 규모를 얻는 법
[도식 11-2] consorzio 구조
7강과 9강에서 규모화 딜레마를 보았다. 규모를 키우지 않으면 경쟁에서 지고, 키우면 조합원 통제가 무너진다. 이탈리아의 컨소시엄은 이 딜레마에 대한 부분적 응답이다.
여러 사회적협동조합이 상시 컨소시엄을 구성해 공동으로 입찰하고 계약을 수행한다. 각 조합은 법적 독립성과 조합원 통제를 유지하면서 계약 단위에서는 하나의 주체로 나타난다. 합병이 아니라 연합이므로 4강의 소유비용 곡선을 오른쪽으로 밀지 않으면서 규모의 이점을 얻는다.
컨소시엄이 성립하려면
① 공공조달 제도가 컨소시엄을 입찰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 많은 나라의 조달법이 단일 법인만 인정한다.
② 조합 간 신뢰가 있어야 한다. 계약 수행에 실패하면 책임이 어떻게 배분되는지가 사전에 정해져야 한다.
③ 컨소시엄 자체의 운영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가 정해져야 한다. 참여 조합의 분담금이 일반적이다.
세 조건 가운데 ①이 없으면 나머지가 갖춰져도 작동하지 않는다. 자국에 이 모델을 도입하려면 조달법 검토가 첫 단계다.
11.3 볼로냐 — 커먼즈가 조례가 되다
2014년 볼로냐시는 「도시 커먼즈의 돌봄과 재생을 위한 시민 협력 규제」를 제정했다. 시민이 유휴 공간이나 자원의 관리를 제안하면 시와 협력협약(patto di collaborazione)을 맺고 그 안에 당사자·기간·책임·비용 부담을 명시하는 절차다.
[도식 11-3] 협력협약의 절차
이 조례가 이론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5강 오스트롬의 설계원리가 행정 절차의 언어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협약은 ① 명확한 경계(대상 공간과 참여자), ② 지역 조건에 맞는 규칙(협약 내용), ③ 집합적 선택(협의 절차), ⑥ 갈등해결 기제(분쟁 조항), ⑦ 자치권 인정(시의 승인)을 문서 하나에 담는다.
동시에 한계도 분명하다. 협약은 시가 승인해야 성립하므로 시민의 자율은 시의 재량 안에 있다. 그리고 참여하는 시민은 대체로 시간과 역량을 가진 계층에 몰린다. 이 두 한계가 아른스타인의 사다리에서 볼로냐 모델의 위치를 결정한다.
11.4 퀘벡 — 현장이 정의를 썼다
[도식 11-4] 공동생산과 공동구성
퀘벡의 사회적경제는 1995년 여성행진(Marche des femmes)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빈곤과 여성 노동 문제를 제기한 이 운동이 1996년 경제사회정상회의로 이어졌고, 그 결과 Chantier de l'économie sociale이 상설 조직이 되었다.
결정적 특징은 순서다. 정부가 사회적경제를 정의하고 현장이 그에 맞춘 것이 아니라, 현장이 정의를 만들고 정부가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공동생산(co-production)과 공동구성(co-construction)의 차이다. 전자는 서비스의 생산 과정에 이용자가 참여하는 것이고, 후자는 정책의 형성 자체에 현장이 참여하는 것이다.
[표 11-2] 두 개념의 구별
공동생산 co-production | 공동구성 co-construction | |
참여의 대상 | 서비스의 생산 · 전달 | 정책의 목표 · 정의 · 설계 |
시점 | 정책이 정해진 뒤 | 정책이 정해지기 전 |
전형적 형태 | 이용자 참여 돌봄 계획 · 자원봉사 | 상설 협의 기구 · 정상회의 · 공동 입법 준비 |
필요 조건 | 이용자 조직화 | 현장의 대표성 있는 상설 조직 |
실패 형태 | 무급 노동의 전가 | 일부 조직의 이해가 과대 대표 |
자료: Vaillancourt(2009)의 구분을 강의용으로 재구성했다. UN이 제시한 SSE 정책 생태계 논의에서도 공동구성이 앞자리에 놓인다.
11.5 참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도식 11-5] 아른스타인의 참여 사다리
아른스타인(Arnstein, 1969)의 여덟 단계는 참여를 세 묶음으로 나눈다. ①②는 비참여, ③④⑤는 형식적 참여, ⑥⑦⑧이 실질적 권력이다. 이 구분이 유용한 이유는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부 자문위원회는 ④ 상담 단계에 있다. 의견을 듣지만 결정은 따로 이루어지고, 반영 여부에 대한 설명 의무도 없다. ⑥ 파트너십부터는 다르다 — 결정 권한이 공유되고, 합의하지 못하면 결정이 미뤄진다.
[표 11-3] 두 사례의 위치 — 판정 예시
단계 | 판별 질문 | 볼로냐 협력협약 | 퀘벡 Chantier |
③ 정보제공 | 정보가 사전에 충분히 제공되는가 | ○ | ○ |
④ 상담 |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가 있는가 | ○ | ○ |
⑤ 회유 | 위원회에 자리는 있으나 결정권은 없는가 | 부분적으로 해당 | 해당하지 않음 |
⑥ 파트너십 | 결정 권한이 공유되는가 | 협약 범위 안에서 ○ | ○ |
⑦ 권한위임 | 특정 영역의 결정권이 이양되는가 | 제한적 | 부분적 ○ |
⑧ 시민통제 | 예산과 인사를 시민이 통제하는가 | ✕ | ✕ |
주: 이 판정은 강의 토론을 위한 예시이며 사례별 · 사업별로 달라진다. 각자 자국 사례로 같은 표를 채워 보는 것이 실습 과제다.
핵심 정리
1.
에밀리아로마냐의 핵심은 조합의 수가 아니라 연합회와 발전기금이다. 정부가 해 줄 일을 부문이 스스로 하는 구조이며, 재원을 부문 안에서 만든다.
2.
컨소시엄은 조직을 합치지 않고 규모를 얻는 장치다. 소유비용 곡선을 오른쪽으로 밀지 않으면서 대형 계약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다만 공공조달 제도가 컨소시엄을 입찰 주체로 인정해야 성립한다.
3.
볼로냐 협력협약은 오스트롬의 설계원리를 행정 절차의 언어로 옮긴 사례다. 동시에 시의 승인에 의존하고 참여 계층이 편중된다는 한계를 갖는다.
4.
퀘벡이 특별한 것은 현장이 정의를 만들고 정부가 받아들였다는 순서에 있다. 공동생산과 공동구성의 차이는 참여의 시점 — 정책이 정해진 뒤인가 전인가 — 이다.
5.
아른스타인의 사다리는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대부분의 자문위원회는 ④ 상담 단계에 있고, ⑥ 파트너십부터가 실질적 권력이다.
생각해볼 문제
1.
협동조합 발전기금 의무 출연은 개별 조합의 재산권을 제한한다. 그럼에도 이탈리아에서 유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합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2.
당신 나라의 정부-민간 협의 기구를 아른스타인의 사다리에 놓아 보라. 몇 단계에 있는가. 한 단계 올리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3.
현장이 정책을 만들면 소수 조직의 이해가 과대 대표될 위험은 없는가. 퀘벡은 이 위험을 어떻게 다루었다고 보는가.
4.
볼로냐 협력협약에 참여하는 시민은 시간과 역량을 가진 계층에 몰린다. 이 편중을 완화할 장치를 두 가지 설계하라.
5.
컨소시엄이 성립하려면 조달법이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당신 나라의 조달 제도는 어떤가. 바꿔야 한다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6.
부문이 스스로 재원을 만드는 구조와 정부 예산에 의존하는 구조는 각각 어떤 위험에 취약한가. 두 위험 가운데 어느 쪽이 관리하기 쉬운가.
논의 주제
아래 주제는 3~5인 조별 토론용이다. 각 조는 결론과 함께 「반대 입장에서 나올 가장 강한 반론」을 하나씩 정리해 발표한다.
주제 1. 생태계는 만들 수 있는가
에밀리아로마냐의 구조는 100년 이상 축적된 것이다. 그것을 정책으로 만들 수 있는가, 아니면 축적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가. 만들 수 있다면 어느 부분부터인가.
주제 2. 의무 출연은 정당한가
발전기금 출연은 잘하는 조합이 새로 생기는 조합을 지원하는 구조다. 잘하는 조합의 조합원 입장에서 이것은 자기 몫의 이전이다. 이 이전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무엇인가. 세금과 무엇이 다른가.
주제 3. 협치는 책임을 분산시키는가
공동구성은 정책 형성에 현장을 참여시킨다. 그런데 그 정책이 실패하면 누가 책임지는가. 선출되지 않은 조직이 정책 형성에 참여하는 것은 민주적 책임성과 충돌하지 않는가.
주제 4. 볼로냐 모델은 공공서비스의 후퇴인가
시민이 공원과 유휴 공간을 관리한다는 것은 시가 하던 일을 시민이 무급으로 떠맡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시민 자치의 확장으로 볼 것인가, 공공서비스 축소의 우아한 이름으로 볼 것인가. 두 해석을 구별할 지표는 무엇인가.
PBL 문제해결 과제
과제 — 자국 협의 기구의 등급 진단과 상향 설계
상황: 자국의 정부-민간 협의 기구 하나를 고른다. 사회적경제 관련이 아니어도 좋다. 지역개발협의회, 노사정 협의체, 도시계획 시민위원회 등이 대상이 된다.
요구 산출물: (1) 표 11-3의 형식으로 그 기구를 아른스타인의 여덟 단계에 배치하고 각 판정의 근거, (2) 판정에 필요한데 확인할 수 없었던 정보와 그 이유 — 회의록 비공개, 반영 여부 미공표 등, (3) 한 단계 올리기 위해 필요한 제도 변경 세 가지와 각각의 저항 세력, (4) 발렌시아 사례처럼 정부와 부문 연합이 격년계획을 공동 승인하고 각 사업의 담당 주체 · 예산 · 평가 시점을 명시하는 방식을 자국에 적용한다면 무엇이 필요한지, (5) 상향이 성공했는지를 2년 뒤 확인할 지표 세 개.
분량과 형식: A4 4쪽 이내. 조별 작성 후 30분 발표 및 교차 질의.
실습 — 광주형 일자리 분석
광주형 일자리는 노동계 · 경영계 · 지자체 · 정부가 임금과 노동조건을 함께 결정한 시도였다. 다음 순서로 분석한다. ① 무엇이 협약의 대상이었는가 — 임금, 고용 규모, 복리후생, 노사관계 가운데. ② 누가 참여했고 누가 빠졌는가 — 특히 협약의 영향을 받는데 참여하지 못한 집단이 있는가. ③ 지속 조건은 무엇인가 — 어떤 조건이 무너지면 협약이 유지되지 않는가. ④ 아른스타인의 사다리에서 이 협약은 몇 단계인가. ⑤ 당신 나라에서 유사한 협약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면 무엇이 없기 때문인가.
핵심 개념 | 협동조합 발전기금 mutual development fund · 컨소시엄 consorzio · 협력협약 patto di collaborazione · 도시 커먼즈 urban commons · 공동생산 co-production · 공동구성 co-construction · 참여 사다리 ladder of citizen participation · 형식적 참여 tokenism |
더 읽을거리
•
Arnstein, S. (1969), “A Ladder of Citizen Participation,” Journal of the American Institute of Planners 35(4). — 11.5절의 원전. 짧으므로 원문으로 읽을 것.
•
Vaillancourt, Y. (2009), “Social Economy in the Co-construction of Public Policy,” Annals of Public and Cooperative Economics 80(2). — 11.4절의 근거.
•
Zamagni, V. and S. Zamagni (2010), Cooperative Enterprise, Edward Elgar, 이탈리아 관련 장. — 11.1~11.2절.
•
Iaione, C. (2016), “The CO-City: Sharing, Collaborating, Competing, and Commoning in the City,” American Journal of Economics and Sociology 75(2). — 볼로냐 규제의 설계자에 의한 설명.
•
Mendell, M. and B. Alain (2015), “Enabling the Social and Solidarity Economy through the Co-construction of Public Policy,” UNRISD. — 퀘벡 경험의 국제적 정리.
•
윤상용 · 정현우 (2020), 「광주형일자리 정책 효과성 제고를 위한 추진전략 및 추진체계 연구」, 재정정책논집 22(1). — 실습 과제의 배경 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