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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V.

5. 폴라니와 커먼즈

시장은 경제의 전부인가. 그리고 공유자원은 반드시 남용되는가.
들어가며
앞의 두 장은 조직을 다뤘다. 이 장은 그 조직이 놓인 경제 자체를 다시 정의한다. 협동조합을 「시장경제 안의 특수한 기업 형태」로 보는 관점과 「시장이 경제의 한 부분일 뿐임을 보여 주는 증거」로 보는 관점은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작업을 검토한다. 폴라니(Karl Polanyi)는 경제가 시장 하나로 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공유자원이 사유화나 국가통제 없이도 관리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둘 다 「시장 아니면 국가」라는 이분법을 깨는 작업이었고, 그 사이에 협동조합과 커먼즈가 놓인다.
그리고 이 장의 후반은 한국으로 돌아온다. 총유(總有)라는 법 형태와 어촌계 어업권은 커먼즈가 이론이 아니라 현행법과 현재 진행형 분쟁의 문제임을 보여 준다.
5.1  형식적 경제와 실체적 경제
폴라니는 「경제적(economic)」이라는 말이 두 가지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인다고 지적했다. 형식적 의미는 희소한 수단 아래에서의 합리적 선택이고, 실체적 의미는 인간이 물질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연 및 동료와 맺는 제도화된 상호작용 과정 전체다.
[표 5-1]  두 개의 「경제」
형식적 경제 formal
실체적 경제 substantive
출발점
희소성과 선택
물질적 욕구 충족의 제도화된 과정
분석 단위
개인의 최적화
제도와 그 배열
시장의 지위
경제 그 자체
여러 조정 원리 가운데 하나
적용 범위
시장경제에서만 유효
모든 사회에 적용 가능
협동조합의 자리
비효율적 예외 · 잔여 범주
호혜 원리의 제도화된 형태
[도식 5-1]  경제의 세 가지 조정 원리
실체적 관점에서 보면 경제의 조정 원리는 셋이다. 호혜(reciprocity)는 대칭적 관계 속의 주고받기이고, 재분배(redistribution)는 중심으로 모았다가 다시 나누는 것이며, 교환(exchange)은 가격을 통한 거래다. 어느 사회에도 셋이 함께 있다. 다른 것은 어느 것이 지배적이냐일 뿐이다.
이 틀은 사회연대경제를 정의하는 데 직접 쓰인다. 협동조합·공제조합·결사체는 호혜 원리를 근대적 조직 형태로 제도화한 것이고, 사회보장은 재분배를 제도화한 것이다. 13주차에서 다룰 국제기구의 SSE 정의가 「이윤보다 사회적 목적을 앞세우는 조직」이라는 다소 모호한 표현을 쓰는 것도, 그 밑에 이 세 원리 구분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5.2  묻어들어 있음과 허구적 상품
폴라니의 두 번째 명제는 경제가 사회에 묻어들어 있다(embedded)는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경제활동은 친족·종교·정치 관계 안에서 이루어졌고 별도의 영역이 아니었다. 19세기의 시장 자기조정 기획은 그 관계를 뒤집으려 했다 — 사회를 시장에 맞추려 한 것이다.
[도식 5-2]  허구적 상품과 이중운동
[표 5-2]  세 개의 허구적 상품
허구적 상품
실제로는 무엇인가
상품화가 낳는 파괴
사회의 대응
노동
인간의 활동 그 자체
건강 · 가족 · 공동체의 해체
노동조합 · 근로기준 입법 · 노동자협동조합
토지
자연 환경
지력 고갈 · 경관 · 생태 파괴
토지이용 규제 · 커먼즈 · 농지 제도
화폐
구매력의 징표
통화 변동으로 인한 기업 파괴
중앙은행 · 금융규제 · 협동조합 금융
주: 세 상품 모두 「판매를 위해 생산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허구적이다.
이중운동(double movement)은 상품화 운동과 사회의 자기보호가 동시에 작용한다는 명제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 힘이 반드시 진보적 형태를 띠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폴라니 자신이 파시즘을 자기보호의 한 형태로 분석했다. 사회적경제가 시장 확대에 대한 대응이라는 서술은 절반만 맞다. 같은 자리에서 배타적 민족주의도 자라난다.
5.3  공유지의 비극과 그 반박
하딘(Hardin, 1968)의 「공유지의 비극」은 목초지를 함께 쓰는 목동들이 각자 합리적으로 가축을 늘리다 초지를 파괴한다는 우화다. 결론은 사유화 아니면 국가통제뿐이라는 것이었고, 이 결론은 이후 30년간 개발정책의 기본 전제가 되었다.
[도식 5-3]  재화의 네 유형과 커먼즈의 자리
오스트롬의 반박은 개념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딘이 묘사한 것은 커먼즈가 아니라 누구나 아무 제약 없이 접근할 수 있는 무주지(open access)였다. 실제 커먼즈에는 경계가 있고, 구성원이 정해져 있으며, 이용 규칙과 제재가 있다. 경계와 규칙이 있는 공유자원은 수백 년간 관리되어 왔고, 오스트롬은 스위스 목초지·일본 입회지·스페인 관개조합 등에서 그 사례를 수집했다.
[표 5-3]  네 가지 관리 체제의 비교
무주지 open access
커먼즈 commons
사유재산
국가 소유
경계
없다
명확하다
명확하다
명확하다
이용 규칙
없다
구성원이 스스로 정한다
소유자가 정한다
정부가 정한다
감시
없다
구성원 상호 감시
소유자
공무원
제재
없다
단계적 · 내부적
법적 배제
행정 제재
전형적 결과
고갈
조건이 갖춰지면 지속
지속 (외부효과는 별개)
감시 비용 과다 시 실패
5.4  오스트롬의 여덟 가지 설계원리
오스트롬의 기여는 「커먼즈도 된다」는 반례를 든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성공한 사례에서 반복되는 여덟 가지 제도적 특징을 추출한 것이 실무적으로 훨씬 중요하다. 이것은 규범이 아니라 진단 체크리스트로 쓰인다.
[도식 5-4]  여덟 원리와 한국 어촌계에서의 대응
여덟 원리를 3강의 이식 논의와 겹쳐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④ 감시, ⑤ 단계적 제재, ⑥ 갈등해결 기제는 라이파이젠 조합의 동료감시·동료집행과 정확히 같은 자리에 있다. 아일랜드에서 빠진 것도 이 셋이었다. 커먼즈 관리와 협동조합 금융은 다른 영역이지만 같은 종류의 집합행동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이다.
체크리스트로 쓰는 법
어떤 공동 자원 관리 제도를 평가할 때 여덟 항목을 각각 (0) 없음 (1) 형식적으로만 존재 (2) 작동 중으로 채점한다. 0점이나 1점이 몰려 있는 항목이 그 제도의 취약점이다.
실무에서 가장 자주 비어 있는 것은 ④ 감시와 ⑤ 단계적 제재다. 규칙을 만드는 데는 합의가 쉽지만 이웃을 제재하는 데는 합의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두 칸이 비어 있으면 나머지 여섯 개가 갖춰져 있어도 규칙은 지켜지지 않는다.
5.5  한국의 커먼즈 — 법과 관습
커먼즈는 한국에서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 현행 민법의 소유 형태이자 진행 중인 분쟁의 대상이다.
[도식 5-5]  공유 · 합유 · 총유
민법 제275조부터 제277조가 규정하는 총유(總有)는 법인 아닌 사단의 소유 형태로, 두 가지 점에서 특이하다. 첫째, 구성원에게 지분이 없다. 둘째, 처분과 변경에는 사원총회의 결의가 필요하다. 지분이 없으므로 분할을 청구할 수 없고, 개인이 자기 몫을 팔고 나갈 수도 없다. 커먼즈의 핵심 성질 — 개인이 쪼개어 가져갈 수 없다는 것 — 이 법 조문으로 명문화된 드문 사례다.
[표 5-4]  한국의 커먼즈와 그 법적 형태
실물 형태
법적 근거
구성원 자격
전형적 분쟁
어촌계 마을어업권
수산업법상 어업권 · 어촌계 정관
일정 기간 거주 · 어업 종사 요건
보상금 배분 · 신규 가입 거부 · 귀어인 배제
마을 공동산림
총유 또는 대표자 명의 등기
마을 주민 · 종중원
대표자 단독 처분 · 명의신탁 해지 · 개발 이익
송계 · 수리계
관습 · 계 규약
관행상 참여 가구
관행 소멸 · 문서 부재로 인한 권리 입증 곤란
주: 총유 관련 판례와 명의신탁 법리는 사안별로 결론이 크게 달라지므로 개별 확인이 필요하다.
표의 마지막 열이 이 절의 논점이다. 세 분쟁 유형은 모두 오스트롬의 ① 명확한 경계 원리와 관련된다. 경계를 명확히 하면 관리가 가능해지지만 동시에 누군가는 배제된다. 어촌계 신규 가입이 사실상 봉쇄되는 현상은 제도가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원리대로 작동한 결과인가. 이 물음이 이 장의 토론 주제가 된다.
핵심 정리
1.
폴라니의 실체적 경제 개념에서 보면 경제의 조정 원리는 호혜 · 재분배 · 교환 셋이며, 시장은 그중 하나다. 협동조합은 호혜 원리를 근대적 조직으로 제도화한 형태다.
2.
노동 · 토지 · 화폐는 판매를 위해 생산된 것이 아닌데 상품으로 취급된다. 이 허구적 상품화가 사회를 파괴하고, 사회는 자기보호로 반응한다(이중운동). 다만 자기보호가 반드시 진보적 형태를 띠지는 않는다.
3.
하딘이 다룬 것은 커먼즈가 아니라 무주지였다. 경계와 규칙과 제재가 있는 공유자원은 사유화나 국가통제 없이도 수백 년간 관리되어 왔다.
4.
오스트롬의 여덟 원리는 규범이 아니라 진단 체크리스트다. 실무에서 가장 자주 비어 있는 항목은 감시와 단계적 제재이며, 이 둘이 없으면 나머지가 갖춰져도 규칙은 지켜지지 않는다.
5.
한국의 총유는 커먼즈를 명문화한 드문 법 형태다. 지분이 없고 분할청구가 불가능하다는 성질이 어촌계 어업권과 마을 공동산림에서 현재 진행형 분쟁으로 나타난다.
생각해볼 문제
1.
오스트롬의 첫 번째 원리는 명확한 경계다. 그런데 경계를 명확히 하면 누군가는 배제된다. 어촌계 신규 가입이 어려운 것은 필요한 폐쇄인가, 부당한 배제인가. 둘을 구별할 기준은 무엇인가.
2.
당신의 나라에 총유와 비슷한 소유 형태가 있는가. 그것은 어떻게 등기되며 어떤 분쟁을 겪는가.
3.
기후는 전형적인 글로벌 커먼즈다. 오스트롬의 여덟 원리 가운데 지구 규모에서 적용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갈라 보라. 불가능한 것을 대신할 장치가 있는가.
4.
폴라니는 파시즘을 사회 자기보호의 한 형태로 분석했다. 그렇다면 「사회를 보호하는 운동」이라는 규정만으로는 어떤 운동을 옹호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무엇을 더 물어야 하는가.
5.
총유는 개인이 자기 몫을 팔고 나갈 수 없게 한다. 이것은 재산권의 과도한 제한인가, 자원을 지키기 위한 필요한 제약인가.
6.
디지털 데이터를 커먼즈로 관리한다고 할 때, 표 5-3의 네 항목 — 경계 · 규칙 · 감시 · 제재 — 은 각각 무엇에 해당하는가. 14주차 데이터 협동조합 논의를 미리 준비하는 셈이다.
논의 주제
아래 주제는 3~5인 조별 토론용이다. 각 조는 결론과 함께 「반대 입장에서 나올 가장 강한 반론」을 하나씩 정리해 발표한다.
주제 1.  경계 설정의 윤리
커먼즈가 지속되려면 배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배제되는 쪽은 대개 나중에 온 사람, 즉 이주민과 청년이다. 지속가능성과 개방성이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둘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설계가 가능한가.
주제 2.  커먼즈는 확장 가능한가
오스트롬이 수집한 성공 사례는 대부분 수십에서 수백 명 규모다. 이 규모를 넘어서면 감시와 제재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커먼즈는 소규모에서만 유효한 원리인가. ⑧ 중층적 조직 원리가 이 한계를 넘게 해 주는가.
주제 3.  국가는 커먼즈의 적인가 조건인가
오스트롬의 ⑦ 자치권 인정 원리는 국가가 자치를 인정해 주어야 커먼즈가 성립한다는 뜻이다. 즉 국가는 커먼즈의 반대가 아니라 전제조건이다. 그렇다면 국가 역량이 낮은 나라에서 커먼즈는 더 어려운가, 더 쉬운가.
주제 4.  호혜를 정책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가
호혜는 자발적 관계에서 자라난다. 정부가 호혜를 「육성」하려 하면 그것은 이미 재분배가 된다. 3강에서 본 관 주도 조합의 실패와 이 문제는 같은 것인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는 어디인가.
PBL 문제해결 과제
과제 — 어촌계 보상금 배분 기준 설계
상황: 개발사업으로 마을어업권이 소멸하면서 보상금 50억 원이 지급되었다. 계원은 80명이며 구성은 다음과 같다 — 3대 이상 거주자 30명, 20년 이상 거주자 30명, 최근 5년 내 귀어인 20명. 어장 관리 노동(종패 살포·감시 당번)에 대한 기여도는 3대 거주자와 귀어인이 비슷하고 오히려 귀어인이 높은 해도 있었다. 어촌계 정관에는 배분 기준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요구 산출물: (1) 배분 기준안 두 개 이상과 각각의 산식, (2) 각 기준이 반영하는 가치 — 거주 기간 · 노동 기여 · 세대 간 상속 · 균등 — 의 명시, (3) 각 안에서 손해를 보는 집단과 그들이 제기할 법적 · 도덕적 반론, (4) 오스트롬의 여덟 원리 가운데 이 분쟁이 드러내는 취약 항목의 진단, (5) 향후 유사 분쟁을 막기 위해 정관에 넣어야 할 조항의 초안.
분량과 형식: A4 3쪽 이내. 조별 작성 후 30분 발표 및 교차 질의. 평가는 배분 비율의 「정답」이 아니라 기준과 가치의 연결이 명시적인지로 한다.
실습 — 자국 커먼즈 진단
각자 자국에 존재하는 공동 자원 관리 사례를 하나 고른다. 공동 목초지, 관개 시설, 어장, 산림, 마을 공동기금, 도시의 공동 공간 어느 것이든 좋다. 오스트롬의 여덟 원리를 각각 (0) 없음 (1) 형식적으로만 존재 (2) 작동 중으로 채점하고 근거를 한 줄씩 적는다. 0점과 1점이 몰린 항목을 확인한 뒤, 그 항목을 보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 법 개정인가, 조직인가, 재원인가 — 를 판정한다. 이 워크시트는 13주차 자국 진단표에 통합된다.
핵심 개념
실체적 경제 substantive economy  ·  묻어들어 있음 embeddedness  ·  허구적 상품 fictitious commodities  ·  이중운동 double movement  ·  호혜 · 재분배 · 교환  ·  공유자원 common-pool resources  ·  무주지 open access  ·  설계원리 design principles  ·  총유 collective ownership without shares
더 읽을거리
•
Polanyi, K. (1944), The Great Transformation, 4~6장 및 “The Economy as Instituted Process”(1957). — 5.1~5.2절의 원전.
•
Hardin, G. (1968), “The Tragedy of the Commons,” Science 162. — 반박 대상이 되는 원문. 반드시 원문으로 읽을 것.
•
Ostrom, E. (1990), Governing the Commo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3장 및 설계원리 부분. — 5.3~5.4절의 핵심 문헌.
•
Ostrom, E. (2010), “Beyond Markets and States: Polycentric Governance of Complex Economic Systems,” American Economic Review 100(3). — 노벨상 수상 강연. 중층적 거버넌스의 정리.
•
한국 민법 제275~277조(총유) 및 어촌계 어업권 관련 판례. — 5.5절의 법적 근거.
•
Bollier, D. and S. Helfrich (eds.) (2015), Patterns of Commoning. — 현대적 커먼즈 사례집. 14주차 데이터 커먼즈와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