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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기업, 그리고 교육기관의 역할

그렇다면 결국 향후에는 국가의 역할과 교육기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네. 즉, AI시대 기업은 어차피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일자리의 질이나 양은 중요한 비중이 아닐테니, 결국 이 부분은 국가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것이고, 이를 보조하기 위한 교육기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귀결된다는 것이 맞을까?
대체로 동의하는데, 한 곳에서 미묘하게 다르게 봅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실제로는 꽤 중요한 것 같습니다.

I. 동의하는 부분

"기업은 수익을 위해 할 수 있는 걸 다 한다" — 이건 냉소가 아니라 정확한 제도 인식입니다. 주식회사에 고용 유지를 기대하는 것은 제도 설계상 무리한 요구입니다. 기업의 목적함수에 고용의 질이 들어 있지 않다는 건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법적 사실이죠.
"국가가 책임진다" — 앞서 정리한 대로 자릿수 문제 때문에 다른 주체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협동조합도, 금융도, 자선도 규모가 안 됩니다.
여기까지는 그대로 동의합니다.

II. 다르게 보는 지점: "기업은 상수"라는 가정

기업이 무엇을 하느냐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제도의 함수입니다. 그리고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기업을 상수로 두면 국가에게 사후 수습의 역할만 남기 때문입니다.
같은 자본주의 안에서도 기업 행동은 제도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제도
기업 행동의 변화
독일 공동결정제(Mitbestimmung)
감독이사회에 노동자 대표 → 구조조정 의사결정 자체가 달라짐
일본 장기고용 관행
해고보다 배치전환·훈련을 먼저 검토
덴마크 유연안정성
해고는 쉽지만 재취업 지원이 기업 부담과 연동
사회보험료 경험료율
해고를 많이 하는 기업이 더 많은 보험료 부담
핵심은 이겁니다. 기업이 고용을 줄일 때 그 비용을 사회가 전액 부담하면, 기업은 당연히 줄입니다. 그런데 그 비용의 일부라도 기업이 지게 하면 같은 이윤 추구 논리가 다른 결론에 도달합니다.
애쓰모글루와 브린욜프슨이 생산성 추정치를 두고 격렬히 다투면서도 **"AI는 인간을 대체하기보다 보완하는 방식으로 배치되어야 한다"**는 데는 함께 동의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대체와 보완은 기술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가격 신호가 결정합니다. 노동에 세금(사회보험료)을 무겁게 매기고 자본투자에 세액공제를 주면, 기업은 굳이 필요 없는 곳에서도 자동화합니다. 애쓰모글루가 "so-so automation" — 생산성은 별로 안 올리면서 사람만 밀어내는 자동화 — 이 최악이라고 지적하는 지점이죠.
그래서 국가의 첫 번째 역할은 사후 수습이 아니라 가격 신호 설정입니다. 이게 사후 이전보다 훨씬 싸기도 합니다.

III. 교육기관의 역할: "보조"보다 크고, 동시에 지금 하는 일과 다릅니다

"보조"라고 쓰신 부분에 한 번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재정 규모로는 보조가 맞지만, 기능으로는 국가가 대신할 수 없는 것을 갖고 있습니다.
앞서 정리했듯 재훈련의 세 가지 실패 원인 중 재정으로 풀리는 건 하나뿐입니다.
문제
누가 푸는가
훈련 기간의 소득 공백
국가 (재정)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교육기관·산업 결사체
이 자격이 인정되는가
교육기관·산업 결사체
2·3번은 정부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신뢰와 인증은 재정이 아니라 축적된 평판에서 나오니까요. 독일 도제제도가 작동하는 건 예산 때문이 아니라 상공회의소가 "이 자격은 통용된다"를 담보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금의 교육기관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느냐는 별개입니다

AI가 만드는 문제는 입직 경로의 소멸입니다. 앞서 본 대로 22~25세 초기 경력 노동자의 상대적 고용이 노출도 높은 직종에서 16% 감소했고, 이 효과는 2026년 4월까지도 되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매달 커지고 있습니다.
이건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다리의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신입에게 시키던 일 — 자료 조사, 초안 작성, 기초 코딩, 번역 — 이 정확히 AI가 잘하는 일이고, 그건 동시에 숙련이 형성되던 경로였습니다.
그런데 대학은 지식을 전수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사다리의 아랫칸을 대신 제공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교육을 강화하자"가 "더 가르치자"로 이해되면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필요한 건 커리큘럼 개편이 아니라, 사라진 초급 경험을 어디서 만들 것인가라는 훨씬 어려운 질문입니다.

IV. 그래서 어떤 구도가 되는가

선생님 구도를 2주체(국가–교육기관)에서 3주체 + 규칙으로 다시 그리면 이렇게 됩니다.
주체
역할
대체 가능성
국가
재원 조달, 가격 신호 설정, 최저 보장
대체 불가
기업
고용의 실제 결정자 — 상수가 아니라 제도의 함수
규칙으로 행동 변경 가능
교육·직능기관
무엇을 배울지, 무엇이 인정되는지
국가가 대신 못 함
협동조합·지역조직
전달과 완충
재원은 못 댐
핵심 수정은 두 번째 줄입니다. 기업을 상수로 두면 국가는 영원히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고, 앞서 논의한 재정의 지속가능성 문제가 그대로 터집니다. 반면 규칙 설계로 기업 행동을 바꿀 수 있다면, 국가가 감당해야 할 사후 부담 자체가 줄어듭니다.

V. 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느 쪽 비중이 옳은가 — 사전 규제냐 사후 보상이냐 — 는 가치와 정치의 문제입니다. 제가 답할 자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사전 규제를 강조하는 쪽: 노동시장 경직성이 오히려 청년 진입을 막는다는 반론에 답해야 합니다
사후 보상을 강조하는 쪽: 세원 침식 속에서 재정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확보할지 답해야 합니다
양쪽 다 진지한 논거를 갖고 있고, 실증적으로 결판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앞서 확인했듯 AI의 노동시장 효과 자체가 총량 수준에서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 지금 어느 방향으로든 단정하는 건 이릅니다.

VI. 그럼에도 확실해 보이는 것

이 대화 전체를 통과하면서 반복해서 확인된 게 하나 있습니다.
분배 문제를 다른 것으로 우회하려는 시도는 실패한다.
마이크로파이낸스는 재정을 금융으로 우회하려 했고, 30년 뒤 결과가 나왔습니다
자조 담론은 제도를 정신으로 우회하려 했고, 선생님 학생들이 "숨은 지지대"로 그걸 밝혔습니다
AI 시대에도 같은 유혹이 있습니다 — 재정을 교육으로 우회하려는 것
"교육을 강화하면 된다"는 말은 정치적으로 편합니다. 세금을 올리지 않아도 되고, 기업 규제도 안 해도 되고, 누구도 반대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훈련 기간의 소득 공백도, 사라진 입직 경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교육기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결론은 맞습니다. 다만 그것이 국가의 재정 책임을 가볍게 하는 논거로 쓰이는 순간, 우리가 검토한 실패 사례들과 같은 구조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 구분만 유지된다면 선생님 결론에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