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항목이 부족한 게 아니라 순서가 뒤집혀 있다는 점입니다. 그 관점에서 정리하겠습니다.
0순위 — 지배구조와 감독 (전제조건)
이것을 "1순위"가 아니라 "0순위"라고 쓴 이유는, 이게 없으면 나머지가 전부 위험을 키우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일본 금융청 감독지침은 관계형금융을 전개하는 기관의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해 경영에 대한 규율과 적절한 지배구조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건전성이 훼손된 사례에서 **「창업자 일족에 의한 장기 경영」, 「경영진의 과도한 원맨 경영」, 「특정 대구좌 융자 확대」**의 폐해가 드러났다고 명시합니다. 2003년 보고서의 지적입니다.
이 셋은 한국 상호금융 부실 원인 목록과 사실상 동일합니다. 일본은 관계형금융의 전제조건으로 23년 전에 못 박았고, 한국은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감독권 이전 문제는 건전성 개선 정도를 확인한 후 하반기에 재논의하기로 미뤄진 상태이고, 새마을금고는 개별 금고의 영업행위 감독을 전적으로 중앙회가 수행하는데 감독 기준과 제재 공시가 다른 금융업권에 비해 매우 허술하다는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논리는 단순합니다. 관계형금융은 현장 재량을 요구하고, 재량에 견제가 없으면 연고 대출이 됩니다. 지배구조를 그대로 둔 채 재량과 인센티브만 늘리면, 예전과 같은 부실이 이번엔 '포용금융'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감독권 귀속 결론, 이사장 연임 제한과 이사회 견제 장치, 중앙회 감독의 실효성과 제재 공시, 대출 심사와 승인의 분리.
1순위 — 중앙회 차원의 공동 데이터·평가 인프라
개별 조합이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중앙이 해야 합니다.
법적 통로는 이미 열려 있습니다. 가명정보 결합의 목적별 현황에서 CSS(신용평가시스템) 개발이 121건, 42.2%로 가장 많고, 금융-비금융 결합이 54%를 차지합니다. 핀테크 결제·행동 정보와 은행 여수신 정보를 결합해 청년층 신용평가 모형을 개발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문제는 자산 수백억원짜리 조합이 데이터전문기관에 결합을 신청하고 모형을 개발·검증할 역량이 없다는 것입니다. 조합에 "각자 CSS를 고도화하라"고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설계는 이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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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회가 공동 평가모형을 구축하고, 개별 조합은 지역 특성으로 보정만 하는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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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이 거절한 차주 중 담당자가 승인할 수 있는 **재량 구간(override)**을 명시적으로 설정하고, 그 구간의 성과를 별도 추적 — 이것이 연성정보를 검증 가능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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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인프라에 다중채무 모니터링을 함께 심을 것.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일의 원인은 정보 부족이 아니라 자금 과잉이었고, 심사가 쉬워질수록 다중채무가 늘었습니다. CSS만 고도화하고 총부채 한도를 안 세우면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2순위 — 성과평가와 인력 운용의 재설계
돈이 가장 적게 드는데 가장 안 하는 항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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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지표 전환: 대출 잔액과 자산 규모로 평가하는 한, 한 건에 오래 걸리는 관계형 대출은 비합리적 선택입니다. 부동산 담보 한 건이 소상공인 대출 수십 건의 실적을 냅니다. 신규 거래처 수, 무담보 여신 비중, 부실 진입 차주의 회생률 같은 지표로 바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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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순환 주기 연장: 연성정보는 조직이 아니라 사람에게 축적됩니다. 2~3년마다 담당자가 바뀌면 관계는 매번 리셋됩니다. 이건 기술 문제가 아니라 인사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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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순환 연장은 유착 위험을 키우므로, 0순위(심사·승인 분리)와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3순위 — 규제 인센티브 (현재 정부가 하고 있는 것)
금융위는 규제비율 산정 시 지역·서민 대상 대출에 가중치를 부여하고, 포용적 금융을 적극 취급한 조합에 비조합원 대출비율·예대율 등 규제를 추가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중앙회가 포용조합에 우대금리를 제공하는 지원 구조와, 경영평가에 포용금융 실적을 반영하는 방안도 포함됩니다.
방향은 맞습니다. 다만 이게 1순위가 되면 안 되는 이유는, 앞의 세 가지 없이 인센티브만 주면 방향만 바꾸고 역량은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심사 역량 없이 서민 대출을 늘리라는 신호를 주면, 결과는 포용이 아니라 부실입니다.
전문가들도 규제 완화가 건전성 관리 소홀로 이어지지 않도록 자체 신용평가모형 고도화 등 정교한 관리·감독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4순위 — "본연의 역할"의 재정의: 대출이 아니라 저축과 평활화
여기서 질문의 표현을 하나 짚고 싶습니다. 상호금융의 "마이크로파이낸스 본연의 역할"을 소액대출 확대로 이해하면 방향이 어긋납니다.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 국제적 실증. 2024년 개도국 성인의 40%가 계좌에 저축했고 이는 2021년 대비 16%p 상승으로 10년 이상 만에 가장 빠른 증가인 반면, 공식 부문 차입은 24%에 그쳤습니다. 30년간의 마이크로크레딧 실험이 도달한 결론은 실수요가 창업 자금이 아니라 안전한 저축과 위험 완충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한국 원형이 그랬습니다. 성가신협 대부금의 용도는 고리채 정리, 가옥 수리, 자녀 학자금, 전세금 마련이었습니다. 사업 자금이 아니라 부채 대환과 생계 평활화였죠.
따라서 복원해야 할 기능은 이런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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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액 비상금 대출 (질병·사고·실직 등 충격 흡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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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리 대환 — 원형이 하던 일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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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부 적금과 저축 매칭 (교육비, 보증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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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조정 연계와 부실 진입자 회생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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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제(보험) 기능 — 위험 완충은 신용보다 보험의 영역
현재 상호금융은 저축기관이 아니라 대출기관이 되어 있고, 그 대출도 담보 위주입니다. 본연의 역할 복귀는 대출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저축과 위험 완충 기능을 되찾는 것입니다.
5순위 — 이중화와 공적 보상
모든 조합을 같은 틀로 다루려 하니 어느 쪽도 안 되는 상태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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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대형 조합: 사실상 소형 은행입니다. 은행 수준의 지배구조·건전성 규제를 적용하고, 관계형금융을 요구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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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감소 지역 소형 조합: 은행 점포가 철수한 지역의 유일한 금융기관인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관계형금융과 금융 접근성 유지를 명시적 임무로 부여하되, 그 비용을 공적으로 보전해야 합니다. 이건 상업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규제 완화 인센티브로는 안 되고 재정이 필요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
우선순위에는 하지 말 것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1.
규모 확대를 통한 생존 전략. 부실 조합 정리를 위한 합병은 필요하지만, "규모의 경제로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발상은 지난 10년간 실패한 노선입니다. 은행과 규모로 경쟁하는 게임에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2.
디지털 전환을 앱 경쟁으로 이해하는 것. 인터넷전문은행과 UI로 경쟁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디지털은 관계형 심사의 비용을 낮추는 도구로 써야지, 비대면 대출 확대 수단으로 쓰면 그냥 저축은행이 됩니다.
3.
정신론. "1960년대 마을금고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처방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마을금고가 성립한 것은 정신이 아니라 조건 때문이었고, 그 조건은 사라졌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복원이 아니라 처음 구축입니다.
4.
부동산·PF 재진입. 설명이 불필요할 것 같습니다.
순서에 대한 마지막 말
이 여섯 가지를 다 하자는 게 아니라, 순서를 지키자는 것이 요지입니다.
현재 정책은 3순위(인센티브)와 1순위의 일부(CSS)만 하면서 0순위(지배구조·감독)와 5순위(재정 보상)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 조합은 위험합니다. 방향 전환 신호는 주는데 역량과 통제 장치는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20년 단위의 일입니다. 일본 금융청은 2003년부터 같은 프레임을 유지하며 반기마다 실적을 측정했고, 2025년 10월에도 금융심의회 '지역금융력 강화 워킹그룹'을 열어 논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은 방안이 나오고 몇 년 뒤 흐지부지되는 패턴을 반복했습니다. 관계형금융은 축적의 문제라 3년짜리 정책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역설적으로, 지금처럼 부실이 드러나고 특별관리를 받는 국면이 **구조 개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창(window)**이기도 합니다. 건전성이 회복되면 개혁 동력도 함께 사라질 가능성이 높습니다.